[가습기살균제 무죄] ①1,613명의 사망자는 자연사인가

조나리 기자 승인 2021.02.11 13:37 | 최종 수정 2021.02.11 13:45 의견 0

“가습기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피해 질환은 폐섬유화”

결국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2011년 폐손상위원회가 발표한 가습기 살균제와 폐손상과의 인과관계가 10년이 지난 2021년 1월 12일 법원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011년 보건복지부의 역학조사 발표 후 지난 10년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피해 질환 확대와 가해기업 처벌을 위해 싸워왔다.

그 사이 옥시 제품에 사용됐던 유해물질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이외에 애경산업이 제조하고 SK케미칼이 판매했던 가습기 메이트 등에 사용된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의 유해성도 입증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 인정하는 피해 질환도 늘어났다. 실제로 CMIT/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만 단독으로 사용한 피해자 중 정부가 피해 질환을 인정한 피해자만 현재 기준 196명이다. 그럼에도 법원은 196명의 피해사실을 외면했다.

지난 1월 12일 법원은 “‘가습기 메이트’의 원료 성분이 폐 질환과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켰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며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및 필러물산, 이마트 관계자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 기업은 가습기 메이트를 광고할 당시 인체에 무해하다는 문구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들 중 폐섬유화 질환은 물론 피부병, 천식 등 기관지 질환을 일으킨 피해자들도 상당수다.

미국은 1998년 CMIT/MIT 성분에 대한 유해성을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진 한참 뒤인 2012년 9월5일에야 미국이 1998년도에 발표한 자료를 그대로 가져와 발표했다. 하지만 검찰은 기소 당시 피해자들의 질환으로 역시나 ‘폐질환과 천식’을 적시했고, 이에 대해 법원 또한 기소된 질환과 CMIT/MIT 성분과의 인과관계가 입장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

이에 일각에서는 해당 성분과 폐질환과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동물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피해자들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미 기존에 발표된 자료들만으로도 가습기 메이트 성분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추가 동물실험? 동물학대·시간끌기 그만하라”

지난 1월 22일 오전 11시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자와 시민환경단체 활동가 등 약 10여명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지난 1월 12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이마트, 필러물산 등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납품업체 임직원 13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상식에 반하는 판결”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가해기업과 그 임직원 범죄를 눈감아주고 무죄를 선고한 제1심 재판부는 물론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 공정거래위원회, 검찰청 등 행정부와 여야정당이 모두 직무를 유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은 또 지난달 당시 한정애 환경부 장관 내정자가 인사청문회에서 언급한 “추가로 중형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해 인과관계를 입증하겠다”는 계획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시민단체는 “쥐건 중형동물이건 모두 인간과 다른 생체구조와 생리기제를 갖고 있다”며 “동물만 학대하고 시간만 끌고, 혈세만 낭비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용역보고서와 법정증언 등에서 재판부도 설득할 수 없는 전문가들이 실시하는 모든 실험 설계·과정·결과 등을 믿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단체와 피해자들은 동물실험 대안으로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이 주관하는 역학조사실시 ▲블라인드 처리된 피해자 임상진료기록 전수조사 ▲피해자가 선정하는 의사(또는 의료기관) 소견 또는 AI 진단 ▲CMIT/MIT 유해성에 대한 해외연구 성과조사 등을 활용할 것을 제시했다.

이어 “사법부는 물론 국민 다수가 그 결론에 따를 것을 합의한 후 세계적으로 저명한 형사법학자, 생리병리학자, 보건환경학자, 의료생명학자, 전문의 등 각 유관분야 학자와 의료인을 초청해 국제세미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박혜정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비상대책위원장이 기자회견장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가해기업 무죄, 배상 분쟁에도 영향 미칠 것”

피해자와 시민단체는 특히 1심 법원의 판결에 분노를 나타냈다. 송운학 개혁연대민생행동 상임대표는 “믿기 어려운 판결이 발생했다.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이 별개라고 하지만, 형사 무죄는 가해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하는 배상 분쟁에서 피해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이어 “건강 상실 등 심신쇄약, 이로 인한 취업기회 박탈 및 생활고 등 최소 3중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은 결국 보상 및 배상을 포기하거나 말도 안 되는 보상액을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우려가 있다”며 “만약에 거대카르텔 의혹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만들고자 함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항소심과 상고심이라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 오심과 오판을 바로잡을 것”이라며 “재판소원제를 도입하고 헌법을 고쳐 소급적용을 허용해서라도 가해기업 등을 응징해야만 한다”고 국회에 촉구했다.

이어 “우리는 기본인권과 직결된 형사사건에서 매우 엄격하게 증거를 판단해야 마땅하며, 그 인과관계가 유죄를 확신할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며 “옥시 등을 처벌받도록 만든 PHMG/PGH 성분은 물론 CMIT/MIT 또한 흡입 또는 노출을 금지해야 마땅한 유해물질이다. 제1심 재판부는 SK케미칼이 비슷한 시기에 이 두 가지 물질을 가습기살균제 원료로 공급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고 분노했다.

한편 시민단체는 검찰 공소장의 피해 질환을 폐질환에서 CMIT/MIT가 일으킬 수 있는 질환으로 변경할 것도 함께 촉구했다.

취재룸J 조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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