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n번방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을 기망해 신상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빌미로 피해자들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했다. /사진=취재룸J
피해자들을 기망해 신상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빌미로 피해자들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했던 가해자들. 검찰은 이례적으로 피해자들의 개명과 주민번호 변경 지원을 변호인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2차 피해 우려를 겪었다고 신진희 변호사는 지적했다.
신진희 변호사와 같은 국선 전담 변호사나 개별 사건의 국선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의 업무 범위는 형사소송에 한정돼 있다. 즉, 원칙적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개명이나 주민번호 변경 등의 업무를 지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찰은 신 변호사에게 이 사건 피해자들의 개명과 주민변호변경 지원을 요청했다. “2차 피해가 너무나 심각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신 변호사는 “처음에 중앙지검에서 n번방 사건 전담팀이 꾸려지고 그 중 피해자 지원을 담당하는 검사님과 계속 미팅을 했었다”면서 “검사님이 피해자들의 인적정보가 유출돼 2차 피해가 너무 심각하다며 피해자들을 위해 개명과 주민등록번호 변경 지원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선 변호사라면 해드려도 문제가 없지만 국선 변호사라 지정된 업무 범위 외 일을 할 수 없었다”면서 “그래서 법무부 여성아동인권팀 측에 제가 소속된 공단과 협의를 해달라고 건의를 했고, 결국 성사가 되면서 피해자들의 개명과 주민번호 변경을 지원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신 변호사는 개별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변경 의사를 확인했고, 그 중 원하는 피해자들에 한해 개명과 주민번호 변경이 이뤄졌다. 하지만 주민번호변경 과정에서 심각한 2차 피해 우려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일부 피해자는 주민번호변경을 포기하기도 했다고.
신 변호사는 “주민번호 변경은 직접 해보니 문제가 너무 많은 제도라는 걸 확인을 했다”며 “주민등록번호의 소관 사무는 주민센터다. 주민센터에 신청서를 접수하고 사유를 내야하는데 사유를 성범죄라고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공무원이라고 하더라도 관심을 갖게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아주 좁은 지역이나 읍·면·동 단위로 가면 누구 집 자녀라는 걸 공무원이 알 수도 있다”며 “또한 첨부되는 서류는 본인이 직접 주민센터로 가서 떼야하고, 그걸 변호사에게 전달하면 변호사가 다시 그 주민센터에 제출하는 형식인데 누가 봐도 이상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신 변호사는 “주민등록변경위원회에 이 같은 애로사항을 전달하고 ‘이게 바로 2차 피해’라고 했더니 관련서류는 자기들에게 제출하고 사유서에는 ‘n번방 사건 피해자’라고 기재하라고 하더라. 그 역시도 문제지 않는가”라며 “결국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면 하지 않겠다하는 분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성범죄 피해는 유독 신고율이 낮다. 신고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물론, 자칫 피해 사실이 알려질 경우 2차 피해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 피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진희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소극적인 목소리도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피해자마다 성장환경과 생활환경, 교육 정도, 생각하는 것 등 모든 게 다 다르다”면서 “때문에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할 경우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원하려고 한다. 변호사의 연락도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적극적으로 피해사실을 호소하는 분들은 일반적으로 소수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고소를 하면 이후 엄청난 고통들을 겪을 수 있는데, 그걸 알면서 고소하라고 조언하기는 어렵다”면서 “피해자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한다. 고소를 하건 하지 않건, 목소리를 안내고 있는 그 소극적인 목소리조차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밝혔다.
신진희 변호사는 n번방 사건 이전부터 이 같은 종류의 범죄 피해자들을 많이 만나왔다고 말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좀 더 조직적이고 잔혹한데다 피해자 수가 많을 뿐, 디지털성범죄는 이전부터 줄곧 있어왔다는 지적이다. 다만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회원이 조주빈이 운영했던 텔레그램 '박사박'의 원조격인 'n번방'을 운영했던 문형욱(갓갓)의 무기징역 선고를 촉구하고 있다.
신 변호사는 “n번방 이라는 방이 있고, 그 방에 성착취물을 올리고, 이것을 다운 받아 갖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런데 그 사람 수가 몇 명인지도 모르겠고 한 사람이 다운받는 순간 이거는 백만명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완전한 삭제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변했고, 범죄 수법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전히 강간이나 강제추행같은 직접적인 신체접홍 행위에 대해서는 성범죄라고 인식하면서 디지털성범죄는 경우 피해 정도가 낮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다”며 “이 같은 인식이 법조계에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n번방 사건으로 인식 전환의 포인트는 왔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어 “경찰관도 이런 류의 신고가 접수될 때 옛날처럼 ‘이거 안돼요’라고 말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임하는 건 사실”이라며 “국민들도 지금은 어느 누구라도 여성과 남성을 불문하고 누구나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가 법조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eNd)’는 올해 안에 지난해부터 이어진 활동 내용을 책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판매금은 모두 활동비용에 쓰일 예정이다. 활동가들은 “이 사건을 잊지 말고 끝까지 함께해 달라”고 강조하며, 용기를 내서 피해자 지원단체의 문을 두드려 달라고 당부했다.
우주 활동가는 “한창 조주빈이 검거됐을 당시 시위도 준비하고 재판도 방청하면서 정신없이 지냈다. 학생들도 직장인들도 개인시간이 없었다”면서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로 함께 행동을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엠마 왓슨이 UN연설에서 했던 ‘If not me, who? If not now, when?’(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이라는 말처럼, 지금 바로 이 인터뷰를 보고 있는 분들이 피해자 단체와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해 사실을 확인한 경우 수사 기관에 가기 전 포털사이트에서 ‘법무부 범죄피해자 보호지원제도’ 또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을 검색한 후 각 기관의 조력을 구할 수 있다. 또한 가족과 친구 등 신뢰관계인과 함께 조사 기관에 동행하라고 활동가들은 조언했다.
안개 활동가는 “본인이 피해자라면 감추거나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신고를 진행해야 한다”며 “도움이 필요하다면 디지털성범죄지원센터 혹은 1366으로 전화해 도움을 청하고, 본인이 피해자는 아니지만 디지털 성착취물을 발견한 경우에는 보지 말고 즉각 신고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활동가들은 “이 사건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시고 절대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며 “피해자분들 역시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힘내셨으면 좋겠다. 저희가 함께 싸워주겠다”고 말했다.
취재룸J 조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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