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하루하루 기쁘게 보내려고 노력해요. 왜냐고요? 하루하루 제 명이 다할수록 그만큼 우리 초원이를 볼 수 있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잖아요.”
2014년 4월 16일. 그날은 단원고 기간제 교사였던 김초원 씨의 26번째 생일이었다. 딸의 생일날이 생의 마지막 날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김성욱 씨. 그는 “아직도 그날의 참담한 심정이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담담히 말을 꺼냈다.
교단에 서기 전 교육 연구소 등에도 합격했던 김초원 씨는 힘들게 선생님하지 말고 취업하라던 아버지에게 “때려죽여도 선생님 하겠다”고 맞섰다. 김씨는 “초원이가 대학 4학년 때 다시 태어나도 꼭 선생님이 되겠다면서 (임용시험을 앞두고) 믿어달라고 했다”면서 “엄마, 아빠가 뒷바라지 끝까지 해 줄테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 그 꿈을 다 이루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초원 씨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희생된 11명의 교사 중 한 명이다. 그 중 기간제 교사는 김초원 씨를 포함해 2명이다. 김초원 씨는 참사 당일 학생들이 있던 4층으로 내려가 구명조끼를 건네고 탈출을 도우다 변을 당했지만 기간제 교사였던 탓에 순직 인정을 받지 못했다.
김씨는 딸이 떠난 후 투사가 됐다. 시간만 날 때면 서울로 달려와 딸의 순직을 인정해달라고 외쳤다. 이후 3년이 흐른 2017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공무원연급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두 기간제 교사의 순직 처리가 이뤄졌다.
김씨는 “2017년 5월 15일 ‘스승의날’에 전화를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면서 “관계부처에 순직 처리 검토를 지시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아무 말 못하고 울고만 있었는데 대통령이 ‘이제 그만 우셔라. 아버지가 씩씩하게 사셔야 딸이 슬프지 않다’고 하시더라. 두 달 뒤 순직 인정서가 집으로 왔다”고 떠올렸다.
물론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었다. 세월호 기간제 교사 유족들이 싸우고 있다는 소식에 민변과 종교계가 나섰다. 신부님들과 스님들은 물론 김초원 씨 대학 동문 교사들이 모여 대책위를 꾸리고 2년 3개월 동안 제 일처럼 싸워줬다.
“특히 스님들과 길거리 오체투지를 할 때는 정말 눈물로 했다. 4번을 했는데 한번 하고나면 다음날 일어서질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다. 그래도 그땐 이렇게라도 해서 하느님과 부처님이 알아준다면 얼마든지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다시 시작된 ‘소송’ 지옥
2017년 스승의날에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후에도 김씨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김씨가 한 달 전에 제기한 소송이 발단이었다.
‘공무원 후생복지에 관한 규정’에 따라 교원들은 근무능률 증진을 위해 맞춤형복지제도가 적용된다. 이 제도는 교육활동 중 일어날 사고에 대비한 생명보험과 상해보험 가입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기간제교사는 여기서도 제외됐었다.
기간제 교사의 맞춤형복지제도와 관련해서는 세월호 참사 전부터 논란이 있었다. 2012년 4월 27일 국가인권위는 부산시교육감에게 맞춤형복지제도 운영시 기간제 교사가 차별받지 않도록 관련 지침을 개정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에도 시정되지 않았다.
결국 세월호 참사 후 기간제 교사 적용 여부를 둘러싸고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전국 교육청을 상대로 직권조사가 실시됐다. 조사 결과 강원교육청과 경남교육청을 제외한 15개 시도교육청 모두 기간제 교사들에게 맞춤형복지를 적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민변과 함께 2017년 4월 14일 당시 경기도교육감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공립학교 기간제 교사는 교육공무원이므로, 맞춤형복지제도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과 교육공무원 판단 여부를 떠나 유일한 복지제도를 적용하지 않은 것은 불법행위(차별)라는 취지다.
김씨는 이에 대해 “소 제기 전 당시 교육감을 만났는데, 왜 가만히 계시냐면서 법을 바꾸기 위해 소송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소를 제기하니 끝까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하기 그지없었다”면서 “(사람들이) 돈 받으려고 소송하냐고 하는데 자식이 죽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겠냐. 다만 승소를 통해 남은 기간제 교사들에게 선례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송 당시 재판부는 김씨에게 ‘승소하더라도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재차 말했다. 김씨는 그런 판사에게 “자식 잃고 1000~2000만원 받겠다고 소송을 하겠냐, 그럼 앞으로 기간제 선생님들은 계속 수학여행갈 때 보험적용을 못받는거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
소송 결과는 1심과 2심 모두 김씨의 패소였다. 김초원 씨 등을 맞춤형복지제도에서 배제한 교육감의 직무집행이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불법행위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소 제기 3년만인 2020년 6월 2일, 대법원도 하급심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길고 긴 싸움이 끝난 순간이었다.
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추석을 몇 일 남겨놓고 경기도교육청에서 소송비용 600만원을 입금하라고 송장이 날아왔다”면서 “그걸 받아볼 때 심정은... 차마 말로 다 못한다”고 씁쓸해했다.
“잊지 말아야 하는데...” 사라지는 세월호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그 반대로 세월호 축소 작업도 진행 중이다. 대표적으로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 지원도 15일자로 종료된다. 대전시가 해마다 지원해오던 희생자 추모 행사 보조금도 올해 전액 삼감됐다. 다만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을 통해 16일 오전 11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세월호 참사 순직교사, 소방관, 의사자 기억식’이 진행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시민들의 모금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정부가 세월호 추모공간과 문화편의시설을 갖추겠다고 발표한 화랑유원지 생명안전공원 사업도 여전히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김씨는 “일부 시민들이 납골당이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는데, 건물 전체가 납골당이 아니다”라며 “그곳은 해외의 유명한 추모공간을 보고 기획한 것으로, 주민들의 편의 공간으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잘못된 정보들이 바로잡히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어 “트라우마 치료 지원도 이제 끝나는데, 유족들은 아직도 4월만 되면 몸이 아프다. 나 역시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못자는 지경”이라며 “병원에서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많은 유족들이 약이 없으면 생활이 힘들다”고 안타까운 사정을 전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사고원인에 대해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옆에서 지켜봐 온 김씨 역시 착잡한 심정이다.
김씨는 “얼마 전에 ‘세월호 기억교실’에 다녀왔는데, 당시 원래 비행기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학생들이 배를 타고 싶다고해서 학부모 동의를 받은 자료를 봤다. 80% 이상 동의를 했는데, 부모님들 마음이 얼마나 한스럽겠냐”며 “수학여행은 꼭 필요한 교육활동이다. 앞으로 절대로 일어나면 안되는 사건인만큼 시민들이 세월호 학생들과 희생된 모든 분들을 잊지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씨는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딸 초원씨의 사진을 들여다 본다. “세월호 인양할 때 초원이 지갑이 발견됐는데 민증하고 현금 3300원 있더라고요. 그 민증을 지금도 제 지갑에 담고 다닙니다. 우리 초원이랑 학생들, 지금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겠죠?” 김씨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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